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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이야기

당당한 노동자가 좋다

펌 | 2026-05-26 08:26:02

조회수 : 429

입력 2026.05.26 06:30 

▲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인천지법 구내식당에서 노조간부들을 만났다. 정년을 앞둔 늙은 노동자들만 보다가 정년 걱정 없는 노동자들을 봤더니 젊다는 것만으로도 다르게 보였다. 10여년 소송하는 동안 소송을 기획, 추진했던 노조간부들은 일부는 정년퇴직하고, 일부는 정년을 앞두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세월 타지 않은 노조간부들을 보니까 젊었던 이 나라 노동운동이 떠오르면서 나는 그냥 좋았다.

2. 현대제철 인천지회와 포항지회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지회로 각기 다른 지역지부에 속해 있다. 기업별노조로 시작해서 현재 산별노조 지회까지 민주노조 기치로 활동해온 사업장이다. 현대제철은 현대차그룹의 철강사업장이다. 1990년대 말 금속산업연맹 법률국장으로 일하던 나는 철가루가 날리던 인천공장과 포항공장의 현장에서 그곳 노조간부들을 처음 봤다. 2000년대 초 현대제철노조와 강원산업노조였다가 산별노조로 전환 이후에는 금속노조의 인천지회와 포항지회로 조직과 소속을 달리하면서 노조활동을 하던 그들을 줄곧 봐왔다. 이렇게 30년 가까이 상담하고 소송하면서 나는 충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노조는 사용자에 굴종하지 않고 꿋꿋이 활동해 왔다. 노조간부들은 조합원의 노동자권리를 위해서 사용자에게 당당히 요구하고 투쟁해 왔다. 곡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금속노조에서 다시 기업노조로 조직변경을 했던 사건이다. 포항공장은 현대차그룹에서 인수하기 전에는 강원산업이었는데, 노조형태는 금속산업연맹을 상급단체로 하는 기업별 단위노조인 강원산업노조였다. 그러다 연맹의 산별전환 방침에 따라 금속노조로 조직형태변경이 추진되자 금속노조 포항지부 소속 현대제철 포항지회로 조직형태변경해서 활동하게 됐다. 당시는 현대차, 기아차, 한국지엠,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등 금속산업연맹 소속 대규모 사업장 노조들이 금속노조로 조직형태변경 결의를 시도했지만 3분의 2 찬성이라는 특별의결 요건에 미달해 산별노조로 전환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업별노조로 활동하고 있었다.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고, 산별노조 체제 확립을 위해 해마다 산별교섭 쟁취 구호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속노조 위임 없이 지회장이 사측과 지회 임단협을 체결하면서 갈등하더니 급기야 포항지회는 산별노조에서 이탈해 기업노조로 전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금속노조 법률원장으로 일할 때였는데, 금속노조는 가처분소송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안타깝다. 하지만 그런 곡절을 거쳐 노조가 제자리로 돌아왔고, 오늘 이렇게 젊은 노조간부들을 만나게 되니 좋다.

내가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단순히 그들이 젊어서가 아니었다. 젊은 그들이 조합원을 위해서 노조활동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들을 만났던 날, 인천지법에서 통상임금 사건의 마지막 변론이 있었다. 2010년대 초부터 3년 단위로 현대제철 조합원들은 집단적으로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해 왔다. 1차 사건은 대법원 판결과 파기환송심 판결을 받아 이미 마무리됐고, 그 뒤 제기한 사건들도 차례로 정리되고 있다. 하지만 이날 사건은 노조전임자, 임시전임자의 노조활동 시간 문제로 원·피고 노사 간에 치열하게 다투고 있어서 법원 판결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이날 노조간부들은 이 통상임금 사건 말고도 새로 제기한 주휴수당 소송에 관해서도 물었다. 승소할 수 있느냐고 묻고, 최종 판결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물을 때마다 조합원을 위한 열정을 느껴져 좋았다.

3. 현대제철 노조간부들을 만나고 1주일쯤 지나서 같은 현대차그룹의 한 계열사 노조간부들을 만났다. 만나는 내내 공기가 무거웠다. 그 직전에 있었던 수원지법 재판 때문이었다. 2014년 회사가 급여규정을 개정해서 상여금 지급기준에 15일 이상 근무조건을 추가했다.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과반수노조가 없는 상태여서 회사는 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을 위해서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회사가 이를 거치지 않고서 급여규정을 개정했다며 위법, 무효라고 우리는 주장했다. 2025년 1월 소장을 제출할 당시 노조는 그렇게 알고서 나와 상담하고 소송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조합원들을 모집해서 소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조는 전주지역 근무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사건에 관한 전주지법 판결문을 갖고 있었다. 그 판결문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서 급여규정 개정은 위법, 무효이고 따라서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적시돼 있었다. 그래서 소송해 왔던 것인데 느닷없이 지난 재판에서 피고 회사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았다고, 전주지법에서 재판할 때는 동의서를 찾지 못해서 제출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찾았다고 동의서를 제출하겠노라고 하는 거였다. 날벼락이었다. 노조간부들에게 파악해 보라고 했고, 그래서 그들은 한 뭉치의 서류를 갖고서 사무실에 찾아왔던 것이다.

노조는 울산지역 근무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고, 그 조합원 대부분인 200여명이 소송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직원은 3천명이 넘고, 전국 100개소에 흩어져 근무하고 있어서 노조가 울산지역 밖에서 벌어졌던 일은 알지 못했다. 만약 2014년 당시에 이곳에 노동자 다수로 조직된 노조가 있었다면, 2014년 회사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도록 함부로 급여규정을 개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전체 사업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조간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회사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 해당 계열사 노조간부들을 만나면서 공기는 무척 무거웠다. 하지만 조합원을 위해서 일하는 그들의 모습에 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4. 이 나라에서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는 사용자가 손쉽게 과반수 동의를 받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임금 등 근로조건을 변경한다. 조직돼 있지 않은 노동자는 그야말로 사용자에게 ‘밥’이다. 그렇게 이 나라는 사용자 맘대로다. 그러다가 노조가 조직돼서 활동하면 들통난다. 사용자가 해왔던 짓들이 드러나 노사 간 심각한 문젯거리가 된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사용자에 맞서 노조를 조직해서 활동하고서야 사용자의 밥이 아니라 사용자를 상대로 밥, 즉 권리를 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는 사용자와 자신의 근로조건를 두고서 협상할 수 있는 사람이, 근로계약관계에서 사용자의 상대방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당당한 노동자가 좋았다. 무노조로 주눅이 든 노동자들을 보다가 노조로 당당하게 요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겠다고 스스로 일어선 노동자들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사용자의 상대방인 ‘사람’, 계약의 당사자가 되게 하는 노조, 거기서 조합원을 위해서 일하는 노조간부들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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