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문제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인생은 곧 생노병사라 한다는데, 그 인생의 첫머리--사람을 낳고, 사람이 태어나고 하는 일--에 해당하는 지점에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출산과 관련하여 생겨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출산파업\'이고 다른 하나는 \'원정출산\'이다. 이 문제들은 둘 다 근자에 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년 전부터 있어 왔고 점차 커져 오던 문제이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상태가 매우 심각해져서 지배 측에서도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사람 잘 키우는 문제--대표적으로 교육문제--가 우리나라 최대의 문제라고 하더니 바야흐로 사람 낳는 문제가 그것을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8월 2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출생`사망 통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이 평생동안 낳는 자녀의 수는 지난해에 1.17명으로 세계 최저--저출산율로 치면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2001년 최저출산율을 기록한 이탈리아(1.25명)의 기록을 경신한 것으로, IMF사태 이후 급격히 저하되어 오다가 마침내 세계 최고(!)에 도달한 것이다.
들리는 얘기로 요즘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특히 여성들 가운데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과 결혼을 하더라도 늦게 하겠다는 사람들의 비중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또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이나, 자녀를 낳더라도 하나만 낳겠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자녀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자식 키우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계획(!)한다는 것이다. 해서, 운동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출산파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조중동 같은 힘센 언론에서도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후에는 인구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게 된다며 큰일났다고 호들갑떨고 있다.
정부에서도 서둘러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고 국회의원들도 속속 의원입법안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유아보육비용의 소득공제한도를 인상하는 등 각종 출산장려책을 내놓은 바 있고, 최근에는 또 국가기관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하여 특수직 공무원에게도 육아휴직을 허용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지난 8월, 출산을 장려한답시고 세 번째 자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국가에서 양육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출산안정법안\'을 고안해 내놓았고, 곧이어 9월에는 출산비용과 육아비용에 대한 국민들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이를 낳는 가정에 50만 원의 출산수당을 지급하고 또 만 4세 이하의 아동을 둔 가정에 아동 1명당 월 5만 원의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아동복지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것이든 국회의원들이 내놓은 것이든 그런 수준의 정책들로 \'출산율 저하 경향\'을 상쇄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확연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지구촌에 60억이나 되는 인구가 있고, 남북한 합치면 우리 민족도 7천만 명이나 되는데 웬 법석들인가. 연 소득이 5억 원을 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고 하고(국세청 발표로 2000년에 비해 2001년에 31.5% 증가), 부자들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파트 평수에서 자녀숫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자들이 자신들의 대를 잇지 못할까 보아서 걱정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가난한 보통사람들 즉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에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이 문제이고, 이들이 재생산되지 않는 것이 걱정거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부자들, 힘있는 자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가? 그들이 언제 우리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인생살이를 걱정했던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임금노예가 재생산되는 것, 단순 재생산을 넘어 확대재생산 되는 것은 자본의 축적 즉 확대재생산에 필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2100년쯤 되면 부양해야 할 노인 인구는 4.5배 가까이 늘어나는 반면 생산가능 인구 다시 말해서 착취가능 인구가 지금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다니 어찌 큰 걱정이 아니겠는가.
이 지점에서 문득 자본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라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생각난다. 평등한 사람들 간에 협력과 유대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이 관계는 주인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만큼이나--재벌이 세습되는 것을 보라! 정치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보라!--종들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어야만 유지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지금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종들의 출산 거부로 인해서!
반전투쟁의 한 방도로서 섹스거부가 제안된 적은 있지만 별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누가 선동하지 않았는데도 출산거부가 자연발생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그렇다. 이따위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세상이 지속되지 않게 하려면 없는 자들은 족속의 재생산을 거부해야 한다. 출산율 저하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때 \'노동거부\'가 주장되기도 했다는데, 그보다 더 발본적인 반자본 투쟁이 아닐까? 동반자 없는 인생, 자식 없는 인생으로 가슴 한구석은 허전하고 쓰리지만 말이다.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좀 저하된다고 민족의 대가 끊어지고 망하겠는가?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자식 없는 팔자(누가 그것을 상팔자라 했는가?)를 잠시 참으면서 가진 자들에게 원정출산을 실컷 하라고 하자. 그들만이 대를 잇고 마음껏 씨를 늘려보라고 하자. 되고 싶다면 전부 미국시민이 되어버리라고 하자. 돈까지 가지고 떠나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자.
하지만 이 두 개의 경향--가진 자들의 씨를 늘이려는 경향과 없는 자들의 씨를 줄이려는 경향--은 모순이다. 그리고 이 모순의 두 측면은 계속 충돌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해결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모순은 바야흐로 경제적, 정치적인 자원배분을 둘러싼 모순에서 나아가서 인간 재생산과 그에 따른 사회재생산의 차원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해결은 돈과 권력이라는 자원의 배분을 이러저러하게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람들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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