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학교를 전쟁터로 만드는 수준별 이동수업
- 어떤 기준으로 학생의 ‘우열’을 평가하는가?
지금 교육현장에는 두 가지 큰 쟁점이 있다. 하나는 교원평가고, 다른 하나는 수준별 이동수업이다. 교원평가가 문제 있는 교사를 추려내고 능력 있는 교사들에게 더 많은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수단일 뿐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수준별 이동수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교육당국은 ‘수준별 이동수업이 현재 진행하는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수준에 못 미쳐 방임되거나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준별 이동수업은 쉬운 말로 ‘우.열반’이다. 필자도 30몇 년 전 학창시절에 우.열반을 경험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열등반과 우등반에 있었던 친구들의 지금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 우열반이라는 것이 교육당국이나 학교장들의 잘못된 실험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기껏 어느 대학에 몇 명이 입학하는가가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 그 구성원들에 대한 진정한 교육의 가치가 사라질 뿐이다. 한 인간으로서 학생들이 지닌 무한한 창의성과 가능성을 자기들 멋대로 재단하여 편을 갈라 세우고 우리에 가두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편을 갈라 세운 교육담당자들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실험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수준별 이동수업을 한다고 치자. 결국은 현재의 학교 실정에 국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실 수, 교실의 규모, 교사 수, 소위 주요과목 교사 수, 학생 수 등을 감안한 범위 내에서만 이동수업을 실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과목성적에 따르겠지만 한 학생의 현재의 성적과 그 과목에 대해 그 학생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 개인의 능력을 수준별로 차등한다고 할 때 어디까지 세분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점수가 동일한 학생만 제외하고는 학생 수만큼 개별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엉터리 같은 방식의 차별화가 도대체 어떻게 있을 있는가? 그리고 이런 수준별 이동수업이 사교육에 의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는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교원평가 주장과 연동해서 본다면 학교교사들이 이미 족집게 과외를 하는 사교육시장에 비해 월등히 실력(대학합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화된 현실에서 수준별 차등수업이 사교육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허구적이다. 오히려 수준별 차등수업이 차별과 경쟁을 격화시켜 사교육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지금 교육당국이 영어와 수학을 중심으로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하겠다고 하는 것은 학교교육의 내실화 보다는 대학입학을 중심에 놓고 학교교육을 재편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는 더욱더 학교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학생의 수준과 개인의 특성에 따른 맞춤식 교육’이라면 굳이 공공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도 다 그런 방식을 도입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 천만에 말씀이다. 전 국민이 황우석에 열광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전 세계로 불어 닥치는 국가경쟁력을 내 건 신자유주의 교육열풍은 쓰나미나 카트라니처럼 교육현장을 황폐시킬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교육행정가나 소위 머리 좋고 공부 잘했던 몇 몇 사람들의 실험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교육정책이 갈지자행보를 거듭해 온 가운데서도 최근 전국의 80여개 비인가 대안학교를 정규학교로 인정하고 다양한 교육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활성화하겠다는 방침은 오랜만의 희소식이다. 사실 그 동안 대안학교로 불려진 학교들은 학교 나름대로 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참여한 가운데 자율적인 교과목을 편성하고 전인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안학교’가 아니라 ‘정상학교’일 뿐이다.
지금 우리사회 전반에 공교육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된 ‘비정상학교’가 일류니, 좋은 학교니 하면서 사람들의 가치를 혼동시키고 있다. 이제 대안학교가 아니라 비정상학교를 정상학교로 만드는 ‘학교혁명’이 필요할 때다. 그런데 이 혁명에 반하는 쿠데타적 발상이 시도되고 있다. 바로 교원평가에 이어 수준별 이동수업이다. 어떻게 하면 차별할 것인가만 골몰하는 학교현장에서 아이들이 받아야 할 상처와 분노, 그리고 적개심은 고스란히 사회로 이전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지 못해 행동할 것이고 그 결과 물량적으로 사회는 성장하겠지만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문제는 그 성장을 상쇄하고도 남을 사회적 비용과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수준별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몇 사람들은 그런 사회가 합리성을 지닌 행복한 사회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만 그 사회가 폭발하기 전까지 말이다. (coreafocus, 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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