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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의 경제시평]박근혜 대통령의 ‘역선택’

글쓴이 : 경향신문 날짜 : 2013-03-20 (수) 18:31 조회 : 2969
1997년 외환위기는 많은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고, 그 결과 경제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초고속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경제 관련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수요는 늘고 비용은 줄어들었으니, ‘재야의 경제 고수들’이 속출했다. 경제학 교수로 밥벌이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경제학 개념이 일상적인 용어로 사용되면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상식선에서 사용하다보니, 오히려 문제의 진단 및 처방에 혼선을 초래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아닌가 싶다. 이 개념은 윤리적·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통칭하는 저널리스틱한 용어로 오용되고 있다. 또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그런 행위는 죄악이다.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불관용의 법치주의 내지 ‘누가 돌을 던지랴. 회개하고 착하게 살자’는 계몽적 도덕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유사 이래 많은 현인들이 이 두 가지 대안으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도덕적 해이 현상이 완화되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으니, 진단과 처방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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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도덕적 해이는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문제다. 예를 들면, 자나깨나 불조심하던 사람이 보험에 든 이후에는 화재예방 노력을 게을리함으로써 오히려 불이 더 많이 나는 상황을 말한다. 이 사람이 갑자기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보험계약자가 약관에 기술된 화재예방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는지 보험회사가 알기 어려운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있고, 따라서 불이 나면 대부분의 경우 보험회사가 손해를 물어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보험계약자는 불조심을 게을리하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정보 문제다.

이런 사례는 많다. 취직만 되면 불철주야 일하리라 다짐했던 청년도 일단 취직하면 과장님 눈치 보며 농땡이 부린다. 생산적 용도에 투자하겠다며 대출 서류에 사인한 기업도 틈만 나면 부동산 투기를 하고 차명계좌를 만든다. 따라서 도덕적 해이 현상을 방지하려면, 엄벌과 계몽 이외에도, ‘네가 한 일을 나는 알고 있다’거나 ‘네가 열심히 하면 내 이익의 일부를 나누어주겠다’는 등의 정교한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장치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고, 때론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성과 보너스 제도가 오히려 글로벌 금융위기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은 간사하고, 그래서 세상은 항상 시끄럽다.

오늘 따분한 경제학 이론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바로 역선택(逆選擇·adverse selection)이다. 도덕적 해이가 계약을 맺은 이후에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후적 문제라면, 역선택은 애당초 거래를 트지 말았어야 할 낮은 질의 상대방과 계약을 맺는 사전적 문제다. 역선택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거래 상대방의 기회를 박탈하고 결과적으로 도태시켜 버린다.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역선택의 문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해이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진 반면, 역선택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인식조차 안되어 있는 듯하다. 채무를 탕감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행복기금 공약이 차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은 넘쳐나도, 갚지도 못할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역선택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외이사가 재벌총수의 고무도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있어도, 외부 소액주주가 독립적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아연실색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된 계약을 맺어놓고, 왜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꼴이다.

똑같은 논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도 역선택의 사례다. 다른 건 몰라도, 현오석 경제부총리 내정과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은 정말 납득할 수 없다.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의 핵심 중 하나가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로서 경제부총리직을 부활한 것인데, 무능력으로 질타받는 현오석 내정자가 그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민주화 공약을 이행할 핵심부처가 공정거래위원회인데, 대형 로펌 변호사로서 대기업을 대리했던 한만수 내정자가 그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잘못된 선택의 원인은 무엇인가.

재차 강조하지만, 역선택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오는 문제다. 수첩에 적힌 제한된 정보로 인사를 하면 잘못된 선택을 피할 길이 없고, 나중에 그 사람이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질책해봐야 소용이 없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다. 정보의 질을 높이고, 인재풀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 주변에 질 낮은 사람들만이 살아남는 역선택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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