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위대한 혁명가 윤세주 선생
1942년 5월 말, 중국 하북성 태항산에서는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를 섬멸하려는 일본군 2개 사단이 포위하여 일대 위기를 맞이합니다. 이 전투는 연안지대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로 일본군의 사단장은 조선인 최초의 중장 홍사익 (종전 후 미국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됨)이었고, 이 태항산 전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이라 불리는 윤세주는 탈출로를 확보하다 다리에 총을 맞은 닷새 뒤 6월 2일 한 동굴에서 전사합니다. 그의 나이 42세 해방을 앞두고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 장렬한 삶을 마감합니다.
윤세주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그 자체로 그의 삶과 운동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윤세주는 1901년 밀양에서 출생 김원봉과는 3살 후배, 불알친구, 동지로서 그와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는 고향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다니고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을 대장으로 12명의 동지들과 같이 의열단을 창립합니다.
의열단 창립멤버의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고 김원봉 등이 이곳에서 배운기간은 1919년으로, 3개월 내지 6개월의 속성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그들은 기본 군사학 뿐만 아니라 특히 폭탄기술 습득에 주력합니다. 박태원이 1947년 펴낸 <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 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약산은 새로 얻은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길림을 떠나, 서간도로 향하였다. 일행 가운데는 한 명의 중국인이 끼어 있었다. 그는 호남 출신의 주황이라는 사람으로, 폭탄제조기술교관이었다. ... 멀리 상해로부터 그를 고빙하여 길림에 이른 것은, 김동삼이란 자다. 그도 지사였다. 당시, 서간도에는 조선인 자치기관으로, 부민회라는 것이 있어, 정부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 부민회에서 신흥학교를 경영한다. 합방 후에 창립한 무관학교였다. 뜻있는 청년들이 많이 이 학교를 찾아와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때의 신흥학교장은 이천민 - 충무공의 종손이었다. \"
오늘날 말하면 의열단 \'조선의 알 카에다\' 기지가 신흥무관학교인 것입니다. 윤세주 또한 이곳에서 폭탄기술을 배워 조선에 잠입했다가 1920년 몰래 들여온 무기가 발각 그 해 6월, 5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의열단 제 1차 밀양폭탄사건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는 여기에서 3.1운동의 궐석재판의 징역 1년 6월을 포함 7년간의 감옥생활을 합니다. 그의 나이 20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옥중에서 독서를 하며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접하고 출옥 후에는 신문사 기자와 사장 등 신분 위장을 하며 1927년 신간회 밀양지회에 참여 5년간 총무간사로 활동합니다.
신간회 해소 뒤 그는 3.1 운동 세대들이 생활의 안정과 운동을 포기하는 세태를 뿌리치고, 1932년 32살에 중국 남경으로 가서 12년만에 김원봉과 감격적으로 재회합니다.
김원봉과 만나서 그는 \" 나의 과거의 인생은 다만 열정과 용기로서만 조선독립을 하려고 분투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나의 경험과 교훈에 근거하여 단혈 열정과 용기만으로는 목적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혁명적 인생관, 세계관 등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나의 두뇌를 재무장하여야, 나아가 정확한 혁명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 라고 합니다.
윤세주의 변화와 함께 그동안의 의열단도 성격이 바뀌어 농공민중정권 수립을 지향하고 민족유일당, 좌우익통일전선운동에 참여하며 개인 테러가 아닌 실천적인 무장투쟁을 병행합니다.
이에 윤세주는 1932년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고 스스로 이육사 등과 같이 생도로 참여, 졸업 뒤에는 교관으로 활동하는 한편 좌우익통일전선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의열단을 대표해서 상무위원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윤세주는 1935년 7월 중국 남경에서 좌우익통일전선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을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당 서기부원과 중앙위원 역할을 합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20년대 해외전선에서 시도하다 실패한 민족유일당의 정신을 이어 받아 허울 뿐인 정부 형태가 아니라 민중의 지지를 받는 당의 형태로서, 기존의 단체를 모두 해소하고 개인자격으로 하나의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때 비로소 의열단도 해체를 합니다. 해외를 포함한 9개 단체가 모여 조선 최초로 통일전선정당을 건설하여 임시정부도 해체할 예정이었으나,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인애국단 소속의 임시정부 고수파는 참여하지 않고 그 뒤 조소앙, 이청천 계열의 이탈이 있었으나 1930년대 후반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해나간 것입니다.
윤세주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 민족혁명 > 의 편집책임자로 일하며 좌우익의 분열주의와 청산주의적 소아병의 폐해를 지적하며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이론과 실천을 펼치고,1937년 중일전쟁을 맞아서는 상해로 가 중국인들과 같이 단파라디오 방송 등 선전작업을 하나 스스로의 무장부대가 없는 한계를 직시합니다.
이에 1938년 당 대회에서 당이 \" 조선전체운동과 유리된 채 중국관내에 국한 \"된 것을 반성하고 1938년 10월 중국 관내 최초의 독립적인 한인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여 창립됩니다.
윤세주는 조선의용대에서의 훈련주임과 기관지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국민당의 통제를 벗어나 단순한 선전전이 아닌 직접전투에 참가를 원하는 젊은 대원들의 화북지방의 해방구 진출에 동조하여 1941년 6월 황하를 건너 그는 평생동지였던 김원봉과 헤어집니다. 김원봉의 오른팔, 넘버 투인 그와 헤어지고 40대에 무장항일 노선에 참여하는 데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지만 참된 항일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젊은 동지들에게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태항산 전투에서 젊은 동지들과 산화한 윤세주는 지금 중국 한단의 혁명열사능에 묻혀있으며, 3.1운동 - 신간회 - 의열단 -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의용대 등으로 이어지는 통일전선운동의 이론가와 실천가로서 향후 남북통일의 과정에서 그의 삶은 귀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