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구미 KEC 노동자 2백여명이 1공장을 점거했다. 파업 127일째, 직장폐쇄 114일째였다. 매년 임단협 때면 일시적으로 파업이 벌어지는 등 노사 간 줄다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 큰 충돌 없이 22년간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해 왔던 KEC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올해 유독 회사 태도가 달랐다” KEC지회 간부들이 올해 임단협을 하면서 하나같이 했던 말이다. 올해 회사는 임단협 과정에서 지회가 파업에 나서자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조합원들을 회유, 협박하며 공세적 대응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자 지난 6월30일 새벽 회사는 주저 없이 용역깡패를 현장에 투입, 직장폐쇄를 단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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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1일, 전날 밤 KEC 여성기숙사를 폭력 침탈해 성추행을 하는 등 지회 조합원들을 공장에서 내쫓은 사측관리자들과 용역깡패들이 공장 정문을 막고 있다. KEC지회 제공 |
애초 KEC지회의 올해 임단협 핵심 요구는 판매영업조직 분리 추진에 따른 고용불안 문제 해소와 타임오프 시행을 앞두고 쟁점이 된 노조 전임자 및 노조활동 보장 요구 등이었다. 반면 회사는 직장폐쇄 전부터 “지회가 타임오프를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내걸고 있다”며 지회의 적법한 쟁의행위를 불법으로 몰아갔다.
KEC사측, 타임오프 문제를 노조파괴 구실 삼아
하지만 타임오프 관련 쟁점은 노조파괴를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직장폐쇄 이후 지회는 타임오프 법적 한도 준수와 인사경영권 관련 회사제시안 수용 의사를 회사에 밝혔다. 그러나 회사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타임오프 문제로 노조가 불법파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지회 간부를 만난 자리에서는 “타임오프는 문제가 아니다. 분사와 희망퇴직, 구조조정이 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10월 초에는 현 집행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까지 표명한다.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될 노동조합을 깨겠다는 것이 분명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회사는 직장폐쇄 이후 지회의 수 십 차례의 교섭 요청을 모조리 거부했다. 국회의원과 구미시장의 교섭촉구도 소용이 없었다. 최근 들어 국정감사에서 KEC 문제가 다뤄지자 이를 의식한 듯 몇 차례 실무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마지못해 거짓 연기를 한 것에 불과했다. 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교섭에서 어떠한 실질적인 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형식적인 만남만을 계속했다고 한다. 대화로 해결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회사의 전술은 분명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지회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것. 경주 발레오만도에서도 사용됐던 전형적인 노조파괴 작전이다. 이미 회사는 대규모 신규채용과 대체인력 투입을 통해 생산 차질을 상당부분 해소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파업기간 신규채용과 대체인력 투입은 노조법상 명백히 금지돼 있다. 노조파괴를 위해서는 불법과 이에 따른 처벌쯤은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직장폐쇄 후 시간 끌기…전형적인 노조파괴 전술
현재 회사는 1인시위 등 합법적인 행위를 빌미로 지회 간부를 비롯해 조합원 108명에게 해고 또는 직위해제라는 중징계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현정호 KEC지회장 외 3명에게는 5억원 규모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다. 쟁점이 됐던 요구까지 양보하면서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던 지회에 던진 회사의 답이었다.
결국 KEC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진행돼왔던 임단협이 올해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 돼 버렸다. 회사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폐쇄로 회사에서 내쫓긴 채 114일 만에 철조망을 뚫고 회사로 들어간 노동자들의 마음은 분명하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순 없다”는 것이다.